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19 혁명 (문단 편집) === [[2월 28일]], [[2.28 학생민주의거|대구 학생 시위]] === 시위의 시작은 2월 28일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당시 [[민주당(1955년)|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장면]] 유세일이 [[일요일]]이었는데 당국에서는 학생들이 유세장에 갈 수 없게끔 '영화 관람'이나 '추가시험' 등의 명목으로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하도록 지시했던 것. 이에 반발한 경북고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에 호응한 대구의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은 27일 시위를 벌였다.[* 1990년대 이후 고등학교 학생운동의 맥이 끊겼고 고등학교 학생운동단체 자체는 존재하지만 그리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고등학생들의 시위라고 하면 낯선 느낌이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생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던 데다가 중학교 입학하는 데도 시험을 치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지라 고등학생쯤 되면 이미 다 배운 성인 취급했고 사회 참여 역시 빈번했다. 물론 명문고가 존재하는 등 고등학교가 서열화되어 있는 것도 한 이유여서 상위권 고등학교가 그 주체가 되었다. 반면 의외로 대학생들의 사회 참여는 저조했는데 어려운 가정 형편에 역시 어렵게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여 신분 상승의 길을 걷기 위해 대학에 입학하다 보니 체제순응적(출세지향적)인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학생들의 미적지근한 사회 참여에 열 받은 고등학생(!)들이 대학 앞에서 시위하는 일도 있었을 정도다. 사실 4.19 혁명이 이후 대학생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의 신호탄이 된 사건이다.] 구체적으로는 [[대구고]], [[경북고]],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계성고]], [[대구공고]]등 8개 학교 총 1200여 명이었다. 다음 날인 28일, 당시 경북고 3학년이었던 학생회장 [[이대우(1942)|이대우]]는 "부정에 항의하고 신성한 권리를 지키는 것"을 요지로 하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같은 경북고 3학년의 중퇴생이던 하청일이 초안을 작성한 결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 속에 끼어 있었던가.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요, 학도이다. >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치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하지만 당국에서는 이를 [[종북몰이|공산당의 사주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고 일축하면서 [[경찰]]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켰다. 당시 이강학 치안국장은 "학생들이 북한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허나 이런 그들의 주장과 무관하게 [[2.28 학생민주의거]]는 '''역사적인 4.19 혁명의 첫 도화선을 당기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선봉에 [[대구광역시|대구시]]가 있었다는 점과[*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좌익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대구는 제1공화국 당시에도 야당 지지 성향이 매우 짙었으며 반 자유당 성향이 아주 강한 지역이었다. 또 민족주의적 성격도 강했는데 1907년에 있었던 [[국채보상운동]]의 시발점이 바로 대구였다. 이렇게 다양한 성향 하에 애국이라는 목적으로 굵직굵직한 시민궐기의 출발이 되었던 대구의 이미지는 박정희 정권 시절을 거치면서 사라져 갔다.] 종래의 동원형 강제 궐기대회가 아닌 '''광복 이후 최초의 자발적 학생 반정부 시위'''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참고로 오늘날 대구에는 이 의거를 기념하는 시설물들이 존재한다. 2.28 기념탑이 경북고와 두류공원[* 원래는 명덕로터리(오늘날 명덕네거리)에 기념탑이 있었지만 훗날 두류공원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경북대사대부고에 있으며 대구의 번화가 [[동성로(대구)|동성로]] 근처에는 [[2.28기념중앙공원]]이 있고 [[명덕역]] 근처에는 2.28 민주운동기념회관이 있다. 다시 돌아와 이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확산되어 수많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관제시위를 통해 맞불 작전에 돌입하였으며 "학생들은 자중하라, 학원으로 돌아가라"는 구호를 외치게 했는데 대항하여 학생들은 "관치행정이 민주주의냐, 썩은 정치 갈아보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어떤 이들은 "대학생들은 어디 있는가? 왜 침묵하는가?" 라며 우회적으로 참여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후 선거 직전에도 대구를 이어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3월 1일에서는 서울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공명선거를 촉구하는 삐라가 각지에서 뿌러졌고 3월 5일과 3월 13일에는 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했다. 학생들은 정권의 사주로 나온 어용시위대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를 진행했다. 3월 10일에는 부산에서 삐라가 뿌려지고 12일에 고등학생 130여 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수원에서 3월 10일, 13일 두 차례에 걸쳐 고등학생들의 열띤 데모가 벌어졌다. 대전에서는 3월 8일, 10일에 대전고등학생 1000여 명이 집결해 격렬한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충돌하여 수십여 명이 연행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시위는 대전에서 발생한 최초의 학생운동 시위였는데 시위를 한 학생들은 나중에 이를 ''''3.8 민주의거''''라고 불렀다. 3.8 민주의거는 2013년 사건 발생 53년 만에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었다. 3.8 민주의거에 참여한 대전 지역 고등학교는 대전고, 대전상고, 대전공고, 보문고, 대전여고이다.] 충주, 청주, 전주 등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선거 전날 시위는 더욱 더 타올라 서울, 부산, 인천, 원주, 포항 등지에서 각 지역 고등학생 수십 또는 수백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학원의 자유'와 '공명선거 실시''''를 외쳤다. 모두 3월 15일에 치뤄지는 선거가 올바른 공정선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2월 28일 '공명선거추진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부정선거를 배격할 것을 결의했다. 한편 2.28 의거 이후부터 3.15 선거까지 발생한 주요 시위와 참여 학생들의 수는 다음과 같다. * 서울 1000여 명 "[[대한민국 헌법 제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균명고[* 현 환일고등학교.], 강문고[* 현 용문고등학교], 중동고, 대동상고, 배재고, 수송고, 선린상고, 경기고, 보인고, 조양고[* 4.19 혁명 이후 폐교되었다고 한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110110020910301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1-10-11&officeId=00020&pageNo=3&printNo=12241&publishType=00010|참고]]], 중앙고, 대신고, 경동고, 경신고, 흥국고[* 현 동국사대부고] 등 * 부산 7800여 명 "우리가 민주제단을 지키자" * 동래고, 부산상고[* 현 [[개성고등학교]]], 동성고, 혜화여고, 데레사여고, 항도고[* 현 [[가야고등학교]]], 영남상고[* 현 [[부산정보고등학교]]], 북부산고[* 1980년 폐교] 등 * 기타 경기도 해동고 130여 명, 대전시 대전고 1000여 명, 대전상고 300여 명, 충청도 충주고 500여 명, 청주고 100여 명, 강원도 원주농고 100여 명, 경상도 포항고 200여 명 등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